호석에 십이지상은 없지만 44개의 받침석이 있고 그 중 정남에 위치하는 받침석에는 친절하게 한자로 이 곳이 입구임을 알려주고 있는 재밌는 왕릉이다.
호석에 십이지상은 없지만 44개의 받침석이 있고 그 중 정남에 위치하는 받침석에는 친절하게 한자로 이 곳이 입구임을 알려주고 있는 재밌는 왕릉이다.
6세기 초 왕릉부터 등장하는 십이지상의 규칙성
정북에서 쥐가 시작되고 반대편은 정남에는 말이 위치한다.
즉, 말이 위치하는 곳이 입구다.
흥덕왕 이후 왕릉에 십이지상이 안타난다.
- 문헌이 아닌 두 눈으로 보는 신라 왕릉
안강 장날은...4, 9일...
아침 산책
여러 나라가 주목할 사건이 발생했다..
새것이 익숙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하든 비슷항
스타일에만 고집하는
아들을 위한 아빠의 선물.
: )
아빠는 이불 한 장 들고 오셨다. 그렇게 들었다.
그리고 총각시절 큰 마음 먹고 Gold star 선풍기와 오랜 동거를 하셨다. 그리고 엄마를 만났고 회사 근처 작은 방을 세들어 사셨다. 이후 내가 태어났고 바다가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갔다. 지금 그 지역은 전부 재개발이 되었고 공교롭게도 친구 형준이가 그 곳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 집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사진으로만 만나본적 있는 집이다.
큰 저수지가 있고 당시 변두리지역이였으나 지금은 그 때 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 않는 5층아파트 건물 4층에 있는 415호 이사를 갔다.
각 층에 두 가구가 있었는데 바로 윗집에는 표준혁, 표누리가 살았다. 기억으로 준혁형은 나보다 두살 많았고 표누리눈 몇살 어렸던것 같다. 그리고 그 맡은편에는 태훈이가 살았다. 김태훈이다. 나랑 동갑내기도 엄청 친했다. 하지만 이 아파트에서 가장 먼저 이사를 떠났다. 울산으로 떠났고 내가 고등학생때 연락방법을 찾아 전화통화를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연락할 방법이 없다.
우리 앞집에는 나보다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고 이름은 남규였던것 같다. 아이 아빠가 무슨일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집에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특히 외국 동전들이 기억에 남는다.
3층에는 태우형과 혜진 누나가 살았고 이후 다른 곳으로 이사 간뒤에도 이웃이 된다. 그때는 아래위집이 아닌 옆집 이웃이다. 그리고 1층에는 박바로보미 누나집이다. 내 피아노 선생님댁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장 많이 놀러갔던 것 같다. 이후에 언양으로 이사가셨는데 내가 대학생일때 우리가족이 함께 언양으로 가서 아주머니를 뵈었다.
바로 앞 동에는 공준영이라는 동갑친구가 살았다. 나는 1학년8반 그 친구는 1학년7반이였다. 우리 두 반은 자주 권력(?)싸움을 했는데 그때 내가 그 친구를 심하게 때려서 이 친구가 입원을 했다. 그래서 우리부모님이 병원에 가서 사과한 기억이 난다. 나도 당시 키가 컷지만 그 친구도 컷다. 나는.. 절대 나보다 작은 사람에게 힘을 쓰지않는다.
그리고 민정누나 민주누나도 앞 동에 살았다. 아주머니가 내 동생을 자주 봐주셨고 내가 고2때 공주사범대 다니던 민정 누나가 내게 과외선생님이 되셨다.
영원할 것만 같던 성냥갑속 우리 이웃들은 그때까지다. 나랑 함께 초등학교 입학했던 태훈이가 울산으로 가고 우리집도 다시 바다가 보이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길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 곳 초등학교 바로 뒤에 꽤 큰 규모의 고아원이있었는데 잠시 다닌 그 초등학교에서 짝꿍이 그 고아원에 살았다.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그 아이가 마음을 쉽게 열지않았다.
+순서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코스마스가 가득한 시골집에서도 잠깐 살았다. 나는..새벽에 깜깜한 어둠을 뚫고 도장에 다녔다. 이 집은 예전에 이 동네 살때 동생을 잃어버린적이 있는데, 이 집 주인분이 동생을 맡아주고 계셨었다. 그래서 인연이 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롯데월드에서도 동생을 잃어버린적이 있다.
그리고 18층?20층? 건물의 11층으로 이사를 갔다. 1304?호에서는 지하주차장 입구를 내려다 볼 수 있었고 눈이 오면 풍경이 나름 괜찮았다. 바로 옆 동에는 당시 좋아했던 여학생이 살았고 맞은편 동에는 최정호가 살았다. 부모님 고향이 부산이라서 우리는 초등학생시절 부산에서도 만났다. 아침저녁으로 베란다에 나가 손전등을 이용해 우리만의 사인을 보내기도 했다. 같은 층에는 4가구가 있었는데 바로 옆집은 이전에 이웃이던 가족 그리고 나랑 동갑인 형욱이 형태가 살았다. 다른 한집은 기억이 안난다. 이 아파트에는 유난히 동갑이 많았다. 김정협, 최세창, 문세리, 정수지 그리고 채...잊었다. 우리반 반장도 했는데.. 일찍 시집갔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입학했던 학교로 다시 전학왔고 4학년때 동네에 새로운 초등학교가 생겨서 전학왔다. 동생은 이 초등학교에서 입학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했다.
중3때 바다가 코앞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21층 중 11층인 1106호에 살았다. 넓은 베란다에 앉아있으면 푸른하늘과 바다만 보였고 고개를 들어 아래를 쳐다보면 백사장이 펼쳐졌다. 태풍이 오는 시기를 제외하면 최고였다. 연례행사처럼 태풍이 올때는 가족들이 밤잠을 설쳐야했다. 너무나도 넓은 베란다의 창문에 대각선으로 테이프질을 하고 바람에 밀릴까 가족이 교대로 창문에 붙어서있었다.
이 집은 넓은 거실과 부엌을 제외하더라도 큰 방이 4개나 있었다. 집이 너무 넓어서 청소할때 힘들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곧바로 꽤 예쁜 2층 짜리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잡지에도 실린적 있는 집이다.
엄마는 1층에서 영국홍차가게를 운영했고 옆에 텃밭도 있었다. 다락방도 있었지만 쌓여가는 짐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집에 상당히 오래 살았다. 이 집에서 고등학교 졸업, 대학 입학과 졸업 그리고 대학원 입학을 했다.
이웃이라고는 우리집과 뒷집 뿐이였는데 동생하고 나이가 비슷한 여자아이가 살았다.
도시에서 자란 아빠는 주택에 사는 것이 꿈이였고 그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텃밭 규모에 만족하지 못하셨고 새로운 곳을 탐색했다. 그렇게 해서 눈에 띈 곳이 지금 집이다.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였고, 무엇보다 농사 지을 수 있는 넓은 땅과 무엇이 만들 수 있는 장소가 충분했다.
처음 이사와서 너무나도 넓은 규모의 농사를 시작하셨고 직장생활과 함께 농사는 너무나도 무리였다.
지금은 무엇이든 다 만들고 어떤 작물이라도 풍년을 이끌어낼 수 있는 아빠가 되셨다. 가족을 위해 살아온 엄마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남편이기도 하다.
처음 아빠가 들고온 이불은 지금 없지만 총각시절 골드스타 선풍기는 아직 내 방에 있다.
아빠의 보물이다. 여전히 잘 작동된다.
작은 5층 아파트 3층에 있는 316호로 이사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