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1. 01:02

그때 그 기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대부분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승엽이형도 결혼을 한다.

다들 오랜만에 만나고, 함께 그때의 이야기를 나눌거라 확신했다. 만나면 반복했던 그 지겨운 이야기를..


하지만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나와 태환이형 뿐이다.


다들 잘지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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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30. 20:59

3D를 책임질 진지청년 진관이(생화학)와 조경 설계 도면을 책임질 방구쟁이가 나의 팀이다.

물론, 나는 모든 것을 총괄한다. 하하하

생태숲 좋더라!  : )


달려보자! 이번에 우리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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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욱환 (학술상심사위원회 위원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인 생은 너무나 많은 우연들이 필연적인 조건으로 작용함으로써 다양해집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전공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을 겁니다. 전공이 같았던 동년배 학우들이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함으로써 흩어진 경험도 했을 겁니다. 같은 전공으로 함께 대학원에 진학했는데도 전공 내 하위영역에 따라, 그리고 지도교수의 성향과 영향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겁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저 는 한국교육학회나 분과학회에 정회원으로 또는 준회원으로 가입한 젊은 학자들에게 학자로서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몇가지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이 조언은 철칙도 아니고 금언도 아닙니다. 학자로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하우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읽기를 바랍니다. 이 조언은 제가 젊었을 때 듣고 싶었던 것들입니다. 젊은 교육학도였을 때, 저는 이러한 유형의 안내를 받지 못했습니다.

직 업에 따라 상당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직업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저는 직업을 생업(生業)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학문은 권력이나 재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학자로서의 성공은 학문적 업적으로만 판가름됩니다. 자신의 직업을 중시한다면, 그 직업을 소득원으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로 받아들여야 맞습니다. 아래에 나열된 조언들은 제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조언들은 제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있다”고 확신하십시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구직난을 호소하지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구인난으로 애를 태웁니다. 신임교수채용에 응모한 학자들은 채용과정의 까다로움과 편견을 비판합니다만, 공채심사위원들은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공정한 선발 과정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기원하면서 요구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는 데에 더 힘쓰십시오.


학문에 몰입하는 학자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젊은 학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모형이 되어줄 스승, 선배, 동료, 후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따라해 보는 방법이 효율적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스타일을 갖추면 됩니다. 학문에의 오리엔테이션을 누구로부터 받느냐에 따라 학자의 유형이 상당히 좌우됩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학문에 혼신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학자들을 직면했을 경우에는, 부정적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다시 말해서, 그 사람들과 다르기 위해 노력하면 정도(正道)로 갈 수 있습니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위대한 학자보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그렇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모형으로 삼으십시오. 의식을 해야만 인식되는 사람은 일상적인 모형이 될 수 없습니다. 수시로 접하고 피할 수 없는 주변의 학자들 가운데에서 모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모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에는, 여러분이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눈을 들어 조금 더 멀리 있는 모형 학자들을 찾으십시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이 훌륭한 학자에 가까워집니다.


아직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가능한 조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학문은 적당히 해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일에 매진할 리 없고, 매진하지 않는 일이 성공할 리 없습니다. 학계에서의 업적은 창조의 결과입니다. 적당히 공부하는 것은 게으름을 연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게으른 학자는 학문적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학계는 지적 업적을 촉구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읽고 쓰는 일보다 더 오래 할 수 있고 더 즐거운 일을 가진 사람은 학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읽었는데도 이해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고 글쓰기로 피를 말리는 사태는 학자들에게 예사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읽고 씁니다. 이 일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일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 가치 있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읽고 쓰는 일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그 일에 다가간다면, 학자로서 적합합니다.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다면, 대인관계를 줄여야 합니다.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은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과 영합(zero sum)관계에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시간을 늘리려면 반드시 다른 일들을 줄여야 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부가 보험설계사의 전화번호부처럼 다양하고 많은 인명들로 채워져 있다면, 학문하는 시간을 늘릴 수 없습니다. 물론 대인관계도 사회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학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불행해집니다.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될 때에는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헌신하지는 마십시오. 젊은 학자들은 어디에서 근무하든 여러 가지 업무―흔히 잡무로 불리는 일―에 동원됩니다. 선택할 수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그 일을 부탁한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보다 직위가 높고 영향력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학자들이 일하는 자세를 눈여겨봅니다. 잡무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에게 평생 직업을 제공하거나 추천하거나 소개하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기 싫지만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성실해야 합니다.


시작하는 절차를 생략하십시오. 논문을 쓸 때 가장 힘든 시기는 시작할 때입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리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면 될 일을 시작하는 절차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길일(吉日)이나 적일(的日)을 찾다가 실기(失機)합니다. 신학기에, 방학과 함께, 이 과제가 끝나면 시작하려니까 당연히 신학기까지, 방학할 때까지, 과제가 끝날 때까지 미루게 되고 정작 그 때가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새로운 변명꺼리를 만들어 미루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답니다(성경 잠언 27:16).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즉시 그리고 거침없이 많이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적기를 기다리다가는 아이디어를 놓칩니다. 사라진 아이디어는 천금을 주어도 되찾을 수 없습니다.


표절은 학자에게 치명적인 오명이 됩니다. 표절은 의식적으로도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일어납니다. 표절에의 유혹은 게으름과 안일함에서 시작됩니다. 표절을 알고 할 때에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유리한 변명이 충분히 만들어집니다. 표절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모르고 표절할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글쓰기에 엄격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하고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발표된 후에 표절로 밝혀지면, 감당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시간과 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서구입에 인색하고 음주나 명품구매에 거침없다면 학자로서 문제가 있습니다. 읽을 책이 없으면 읽어야 할 이유까지도 사라집니다. 책을 구입하고 자료를 복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면 구입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지를 따지는 것은 책을 사지 않으려는 이유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문헌들을 읽거나 가까이 두고 보아야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새 책을 구입했을 때나 새 논문을 복사했을 때에는 즉시 첫 장을 읽어두십시오. 그러면 책과 논문이 생경스럽지 않게 됩니다. 다음에 읽을 때에는, 시작하는 기분이 적게 들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구입한 책과 복사한 논문을 도서관 자료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읽은 부분에 흔적을 많이 남겨두십시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반론이 생각나면, 그 쪽의 여백에 적어두십시오. 그것이 저자와의 토론입니다. 그 토론은 자신이 쓸 글의 쏘시개가 됩니다.


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학회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손님처럼 처신하지 마십시오. 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긍정적 모형들과 부정적 모형들을 많이 접해보십시오. 좋은 발표들로 모범 사례들을 만들어가고 실망스러운 발표들을 들을 때에는 그 이유들을 분석해보십시오. 학회에 가면 학문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학회에 가면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성적 자극도 받을 수 있습니다.


지도교수나 선배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해주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 지도교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의 조언은 학위논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와 도움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들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홀로서기가 시련이듯이, 학자로서의 독립도 어렵습니다. 은사나 선배에의 종속은 그들의 요구 때문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젊은 학자들이 스스로 안주하려는 자세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걸작(傑作)이나 대작(大作)보다 습작(習作)에 충실하십시오. 논문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걸작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들은 다른 학자들의 논문들을 시시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찮게 평가한 논문들과 비슷한 수준의 논문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논문을 쓰는 데 엄청난 압박을 느낍니다. 걸작에 대한 소망은 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걸작은 쉽게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걸작을 지향한 논문이라고 해서 걸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논문을 쓸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그 논문들이 쌓여지면서 걸작과 대작이 가능해질 뿐입니다.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곧바로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이 시작됩니다. 교수직을 구하려면 반드시 연구업적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많은 대학에서 연구보고서는 연구업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저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번역서에 대한 평가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습니다. 번역보다 창작에 몰두하십시오. 번역은 손쉬워 보이지만 아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역했을 경우에는 지적 능력을 크게 의심받습니다.


학자가 되고 난 후에는 저서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압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 책을 찾을 때 다른 학자들이 쓴 책들만 보이면 상당히 우울해집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이 교과서와 전공서를 출판할 때에는 뒤처지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교과서 집필을 서두릅니다. 교과서 집필은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어렵습니다. 교과서에 담길 내용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논문과는 다르게, 교과서 집필은 다른 학자들도 알고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어서 표절의 가능성도 아주 높고, 오류가 있을 경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학자로서 최소 10년은 지난 후에 교과서 집필을 고려하십시오.


학회에 투고한 논문이 게재되지 않더라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학회에서 발행되는 정기학술지에의 게재 가능성은 50퍼센트 수준입니다. 까다로운 학술지의 탈락률은 60퍼센트를 넘습니다. 그리고 학계의 초보인 여러분이 중견․원로 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아이디어를 짜내어 논문을 작성한 후 발송했더니 투고양식에 맞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거나,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게재불가 판정을 한 심사평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신 문헌과 자료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문외한인 심사자를 만나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게재불가를 받은 자신의 논문보다 훨씬 못한 논문들이 게재되는 난감한 경우도 겪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투고해야 합니다. 학회에 투고하기 전에 학회 편집위원회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들로부터 예비 심사를 받기를 권합니다.


학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학문 활동을 쉽게 생각합니다. “앉아서 책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은 소일거리처럼 책만 보는 일이 아닙니다. 논문작성은 피를 말리는 작업입니다. 이 일을 오랫동안 해 온 저도 논문을 작성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논문은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계에는 깜짝 놀랄 일이 많지 않습니다. 논문의 주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찾아야 합니다. 논문은 새로운 것을 밝히는 작업이라는 점에 집착함으로써 낯선 분야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논문을 쓰려면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논문의 아이디어는 직감(hunch)에서 나올지 몰라도 논문 글쓰기는 분명히 인내를 요구하는 노역입니다. 책상에 붙어 있으려면 책상에 소일거리를 준비해 두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컴퓨터는 최상의 제품을 구비하십시오. 프린터는 빨리 인쇄되는 제품을 구비하고 자주 인쇄하십시오. 퇴고는 반드시 모니터보다는 인쇄물로 하십시오. 퇴고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비판적으로 살펴보십시오. 논문의 초고를 작성했을 때쯤이면 내용을 거의 외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류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작성하더라도 초고에는 오류가 아주 많습니다. 이 오류들을 잡아내려면 그 논문을 남의 논문처럼 따져가며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부터도 읽고, 뒤에서부터도 읽어야 하며, 중간부터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래 묵혔다가 다시 읽어보기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학회에 투고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남의 글을 비판하듯 읽기 때문입니다. 논문심사자들은 심사대상 논문에 대해 호의적이 아닙니다. 이들은 익명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탈락률을 높여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에는 아주 냉정해집니다.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반드시 지적 업적을 갖추어야 합니다. 연구업적이 부족하면, 학계에서 설 땅이 별로 없습니다. 부족한 연구업적을 다른 것들로 보완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떳떳하지도 않습니다. 쫓기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우울해집니다.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발간되는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관심이 끌리는 논문들은 복사하여 가까운 데 두십시오. 그 논문들을 끈기 있게 파고들면, 여러분이 써야 할 글의 주제와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젊은 교육학자들이 학자로서의 일상을 즐거워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 가지 학술모임에서 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들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한국의 교육학이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 필자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석사,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Ph.D.,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출처: 한국교육학회 뉴스레터 Vol.45, No.3, 통권 260호 (20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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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살면서 부모님한테 한번도 듣지 않은 이야기를

오늘 하루동안 엄청나게 들었다.

근데 그 말이 다 맞는 말이다.


충분히 자극이 된다. 하지만.....오늘은 또 이렇게 자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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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동이전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東夷: 夫餘·高句麗·東沃沮·相婁·濊·韓·倭.

前言

書稱[東漸于海, 西被于流沙]. 其九服之制, 可得而言也. 然荒域之外, 重譯而至, 非足跡車軌所及,
未有知其國俗殊方者也. 自<虞> <周>, 西戎有白環之獻, 東夷有<肅愼>之貢, 皆曠世而至, 其遐遠也
如此. 及<漢>氏遣<張騫>使<西域>, 窮<河>源, 經歷諸國, 遂置都護以總領之, 然後<西域>之事具存,
故史官得詳載焉. <魏>興, <西域>雖不能盡至, 其大國<龜玆>·<于 >·<康居>·<烏孫>·<疎勒>·<
月氏>·< 善>·<車師>之屬, 無歲不奉朝貢, 略如<漢>氏故事. 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 天
子爲其絶域, 委以海外之事, 遂隔斷東夷, 不得通於諸夏. <景初>中, 大興師旅, 誅<淵>, 又潛軍浮
海, 收<樂浪>·<帶方>之郡, 而後海表謐然, 東夷屈服. 其後<高句麗>背叛, 又遣偏師致討, 窮追極
遠, 踰<烏丸>·<骨都>, 過<沃沮>, 踐<肅愼>之庭, 東臨大海. 長老說有異面之人, 近日之所出, 遂周
觀諸國, 采其法俗, 小大區別, 各有名號, 可得詳紀. 雖夷狄之邦, 而俎豆之象存. 中國失禮, 求之四
夷, 猶信. 故撰次其國, 列其同異, 以接前史之所未備焉.

'서경'에서 말하길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유사에 접한다.'라고 하니, 이는 그 구복
의 제도를 얻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거칠은 지역의 바깥에도, 중요한 역사들이 이르렀으나, 발
자취와 수레바뀌가 미치지 않으면, 그 나라의 풍속과 타국을 알 수 없다. '우'에서 '주'에 이르
기 까지 서융은 백환을 받침이 있었고, 동이는 '숙신'의 조공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대에 이르
르는 것이니, 멀고 먼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한'에 이르러 '장막'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황
하'의 근원에 다다르고, 여러나라를 지나니, 이르러 도호를 둠으로써, 이를 다스렸다. 그러한 이
후로 서역의 일이 보존하게 되고, 고로 사관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위'가 일어
나자, '서역'이 비록 능히 전부 이르르지 못했으나, 그 큰 나라인 '구자', '우치', '강거', '오
손', '소륵', '월씨', '선선', '거사'가 속하니, 세세토록 조공을 받치지 않음이 없으니, '한'의
옛일과 같은 다스림이었다. '공손연'이 아버지, 할아버지부터 삼대를 '요동'에 있으니, 천자가
그 지역과 단절하고, 해외의 일을 내버려 두었다. 이에 '동이'와 단절하고, 여러 나라들은 통함
을 얻지 못하엿다. '경초'중에 군사를 크게 내어 '연'을 베고, 군사를 죽이니, '낙랑'과 '대방'
의 고을을 거두어 들이니, 후에 바다가 고요해 지고, 동이가 굴복하였다. 후에 '고구려'가 모반
을 하자, 또 군사를 파견하여 치고, 멀리까지 쫓아가니, '오환'과 '골도'를 넘어, '옥저'를 지
나, '숙신'의 땅까지 밟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늙은 노인이 말하길,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해가 떠오르는 곳 가까이 있다 하여, 두루 여러 나라를 보아 그 법과 풍속을 얻으
니, 크고 작은 구별이 있고 각각 이름이 있어 가히 얻어 자세히 기록하는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지만, 조두모양의 그릇이 있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 버리면, 사이에서 구한다 하는 것은
역시 믿을만 한 것이다. 고로, 그나라의 일을 기록하여, 같음과 다름을 열거하여 과거의 역사가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을 보충하려고 하는 것이다.


夫餘

<夫餘>在<長城>之北, 去<玄 >千里, 南與<高句麗>, 東與<相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
二千里.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序大, 性彊勇謹厚, 不寇 .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 加·狗加·
大使·大使者·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諸加別主四出, 道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
食飮皆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
時斷刑獄, 解囚徒. 在國衣尙白, 白衣大袂, 袍·袴, 履革 . 出國則尙繒繡錦 , 大人加狐狸·
白·黑貂之 , 以金銀飾帽. 譯人傳辭, 皆 , 手據地竊語.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다.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 '고구려'가 있고, 동쪽으로
'읍루'가 잇으며, 서쪽으로 '선비'가 있다. 북쪽으로 '약수'가 있으며, 가히 이천리이고 호수는
팔만호이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궁실과, 창고, 감옥이 있으며, 산과능선이 많으며, 연
못이 넓으니, 동이의 지역중에 가장 평평하다. 흙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과격하고, 크다.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갈 줄 알고, 후덕하니 도둑질 하지 않는다.
나라에 군옹이 있고, 모두 여섯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하니, '마가', '우가', '저가', '구
가', '대사', '대사자', '사자' 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는데, 신분이 천한 사람들을 모두
노비로 하였다. 여러 '가'의 주인은 각각 사방을 다스리는데, 도가 큰자의 주인은 수가 천집이고
작은자는 백집이다. 음식을 먹음에는 모두 조두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마시며,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출입한다.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데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 이를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가둠
이 없고, 죄인들을 풀어준다. 나라에서 옷에 흰색을 숭상하여, 백색 옷에 소개가 넓고, 도포와
바지가 있다. 신발은 가죽으로 한다. 나라에서 나갈때는 비단옷을 입기를 숭상한다. 성인은 여
우, 원숭이, 흑색담비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통역하는 사람이 말
을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婦人 , 皆殺之. 尤憎 , 已殺, 尸
之國南山上, 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兄死妻嫂, 與<匈奴>同俗. 其國善養牲, 出名馬·赤
玉·貂 ·美珠. 珠大者如酸棗. 以弓矢刀矛爲兵, 家家自有鎧仗. 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 作城柵皆
員, 有似牢獄. 行道晝夜無老幼皆歌, 通日聲不絶.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其死, 夏月皆用 . 殺人殉葬, 多者百數. 厚葬, 有
槨無棺.{《魏略》曰: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 其祭亡者, 有生有熟. 喪主不欲速而他人彊之, 常諍
引以此爲節. 其居喪, 男女皆純白, 婦人着布面衣, 去環 , 大體與中國相彷彿也.}
형벌을 사용함에 엄하고 급하여,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열두배로 갑으며, 남녀가 음탕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이를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
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위에 두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
로 갚은후 옮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는데, '흉노'와 풍습이 같다. 나라에서 좋은 소
(제사용)을 기르고, 이름있는 말, 붉은 옥과 담비와 아름다운 구슬이 나온다. 구슬이 큰 것은 대
추만 하다.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써 병기를 하고, 집집마다 모두 갑옷과 무기가 있다. 나라의
늙은 노인이 말하길, 옛날 망명인들이 성을 지을 때 성책을 둥글게 하니, 감옥과 같았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
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 굽이 풀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
쳐져 있으면 길하였다. 적의 침입이 있으면, 모든 '가'들이 스스로 전쟁을 하는데, 아래 백성들
은 양식과 음료를 짊어지고 이를 먹였다. 그가 죽으면, 여름에는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으면, 백명이나 되었다. 장사는 후하게 치루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위
략'에 그 풍속에 장사는 오개월이나 되는데, 오랠수록 성한 것이다. 망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산채로 하는 것도 있고, 익히는 것도 있다. 상주는 빨리 하고자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강제
로 잡아당겨 다투면서 이를 한다. 상에 거할 때, 남녀는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거리와 패물을 때어 놓으니,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함이 있다.



<夫餘>本屬<玄 >.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
>·<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尉仇台>死, <簡位居>立. 無適子, 有 子<麻余
>. <位居>死, 諸加共立<麻余>. 牛加兄子名<位居>, 爲大使, 輕財善施, 國人附之, 歲歲遣使詣京都
貢獻. <正始>中, <幽州>刺史< 丘儉>討<句麗>, 遣<玄 >太守<王 >詣<夫餘>, <位居>遣大加郊迎,
供軍糧. 季父牛加有二心, <位居>殺季父父子, 籍沒財物, 遣使簿斂送官. 舊<夫餘>俗, 水旱不調, 五
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하였는데, '한'말에 '공손도'가 바다 동쪽에서 크게 일어서자, 바깥
오랑캐를 위엄으로 복속시켰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에 속하였다.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자, '공손도'가 '부여'가 두 오랑캐 사이에 있자, 종실의 여자를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
가 죽자, '간위거'가 섰다.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인 '마여'가 있어, '위거'가 죽자 여러 '가
'들이 함께 '마거'를 세웠다. '우가'의 형의 아들이 있는데, 그 이름도 '위거'이니, 대사로 하였
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선을 배푸니, 나라사람들이 따랐다. 세세토록 사신을 파견하여 서울
에 이르러 공물을 바쳤다. '정초'중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구려'를 벌하고, '현토' 태수 '왕
기'를 부여에 보냈는데, '위거'가 대가를 보내어 성 밖에서 맞이하여, 군량을 보태었다. 계부인
우가가 두 마음이 있자, '위거'가 계부의 아비와 아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기록하고, 염송
관으로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 들고, 날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면,
갑자기 그 왕을 책망하는데, '혹 바뀜이 마땅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 郡>, 王死則
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 >庫猶有玉匣一具. 今<夫餘> 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 傳世以爲
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魏略》曰: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似)[以]也.{《魏略》曰:
舊志又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有氣如?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捐之於 中, 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
之, 名曰<東明>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
水, 魚鼈浮爲橋, <東明>得度,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夫餘>之地.}

'마여'가 죽었는데, 그 아들 '의려'가 여섯 살로 왕위에 올랐다. '한'때에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토군'에 놓아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가져다가 장사하였다. '공손
연'을 쳤을 때 '현토'의 곳간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이제 '부여'의 곳간에는 옥벽과 규와 제기
들이 있으니, 세세토록 전하는 보물로, 늙은 노인이 말하길 선대에 하사 받은 것이라 한다. [위
략에 말하길 그 나라는 몹시 부유하니 선대부터 왔다.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 그동장의 글자에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스스로 '망인'이라 하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위략에서 말하길
예날 북방에 '고리'국이 있었다. 그 왕의 시녀가 태기가 있어,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자 시녀가
말하길 계란같은 기운이 있어 내려와 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으니 왕이
돼지 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기운으로 덥히고,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들도 이와 같아, 죽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하늘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
름을 '동명'이라 하고 말을 기르게 명하였다. '동명'은 궁술에 능하자, 왕이 나라를 빼앗길까봐
두려워 하여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
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네 흩어지
자, 쫓던 병사들은 건널수가 없었다. '동명'은 이로 인하여, '부여'의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다.



高句麗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
可二千里, 戶三萬. 多大山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
腹. 其俗節食, 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祀靈星·社稷. 其人性凶急, 喜寇 . 其
國有王, 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 衣先人, 尊卑各有等級. 東夷舊
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 本有五族, 有<涓奴部>·<絶奴部>·
<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
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
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
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 郡>受朝服衣 ,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于東界築
小城, 置朝服衣 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 溝 >. <溝 >者, <句麗>名城也. 其置
官, 有對盧則不置沛者, 有沛者則不置對盧.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雛加. <涓奴部>本國主, 今雖不
爲王, 適統大人, 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雛之號. 諸大加
亦自置使者· 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 衣先人同列.

한나라때에 북치고 피리부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하사하였는데, 항상 '현토군'에서 조복과 의책
을 받아갔다. '고구려'를 영주로서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후에 점점 교만해지고 방자해 지더니.
군에 복종하지 않고, 또한 동쪽 경계에 작을 성을 쌓았다.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 두면, 해마
다 이를 가질러 왔다. 이제 '호'들 조차도 그 성의 이름을 '책구루'라 한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관을 두고 '대로'을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왕의 종족으로 '대가'는 모두 '고추가'로 칭하는데, '연노부'가 본래 나
라의 주인으로 이제는 비록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혈통을 잇는 대인으로 '고추가'가 칭한다. 역
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다. '절노부'는 세세토록 왕과 혼인을 하
는여, '고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러 대가들은 역시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어 그
이름을 모두 왕에게 알리는데, '대부' 벼슬하는 집의 신하들은 모임에 앉거가 일어서는데 있어,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반열을 얻지는 못한다.

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
聚, 相就歌戱. 無大倉庫, 家家自有小倉, 名之爲 京. 其人 淸自喜善藏釀. 拜申一脚, 與<夫餘>
異, 行步皆走.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其公會, 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大加主簿頭著
, 如 而無餘,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그 나라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데,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
리서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손히 보태준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
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
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
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
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 無牢獄, 有罪諸加評
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壻暮至女家戶
外, 自名 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已長大, 乃將
婦歸家. 其俗淫.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柏.
其馬皆小, 便登山. 國人有氣力, 習戰鬪, <沃沮>·<東濊>皆屬焉. 又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
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 出好弓, 所謂
<貊>弓是也.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를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
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
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후 꿇어 엎
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보통 두세번 한다. 여자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 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 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
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조금씩 죽어서 입을 옷
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죽은자에게 보낸다.(함께 묻는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들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 사람들
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힌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속하였다. 또한 '소수맥'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북쪽에 소수가 잇어 남쪽으
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
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이라 한다.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 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田譚>遣擊之, 爲
所殺. 州郡縣歸咎于<句麗侯>< >, <嚴尤>奏言: [<貊>人犯法, 罪不起于< >, 且宜安慰, 今猥被之
大罪, 恐其遂反.] <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期<句麗侯>< >至而斬之, 傳送其首詣<長安>. <莽
>大悅, 布告天下, 更名<高句麗>爲<下句麗>. 當此時爲侯國, <漢><光武帝>八年, <高句麗王>遣使朝
貢, 始見稱王.

'왕망'초에 '고구려'병사를 일으켜 '호'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
이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
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위로함이 마땅
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
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자, '추'가 이르자 이
를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마땅히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至< >·<安>之間, <句麗王><宮>數寇<遼東>, 更屬<玄 >. <遼東>太守<蔡風>·<玄 >太守<姚光>以
<宮>爲二郡害, 興師伐之. <宮>詐降請和, 二郡不進. <宮>密遣軍攻<玄 >, 焚燒<候城>, 入<遼隧>,
殺吏民. 後<宮>復犯<遼東>, <蔡風>輕將吏士追討之, 軍敗沒.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현토'가 속하
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궁'이 두 고을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
으켜 이를 쳤다. '궁'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
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
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


<宮>死, 子<伯固>立.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又攻<西安平>, 于道上殺<
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靈帝><建寧>二年, <玄 >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
降, 屬<遼東>. (嘉)<[熹]平>中, <伯固>乞屬<玄 >. <公孫度>之雄海東也, <伯固>遣大加<優居>·主
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 破之.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겨
향'을 약탈하고,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길위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얻어,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 수백
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길
빌었다. '공손도'의 웅지가 바다동쪽에 이르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등을 파견하
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 自<伯固>
時, 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拔奇>怨
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 <伊夷
模>更作新國, 今日所在是也. <拔奇>遂往<遼東>, 有子留<句麗國>, 今古雛加< 位居>是也. 其後復
擊<玄 >, <玄 >與<遼東>合擊, 大破之.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이다. '발기'가 불
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때에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 나
라를(고구려)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
노부'의 '가'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에 항복하고,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항복
한 '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
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인 '교위
거'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
다.


<伊夷模>無子, 淫<灌奴部>, 生子名<位宮>. <伊夷模>死, 立以爲王, 今<句麗王><宮>是也. 其曾祖名
<宮>, 生能開目視, 其國人惡之, 及長大, 果凶虐, 數寇 , 國見殘破. 今王生墮地, 亦能開目視人,
<句麗>呼相似爲位, 似其祖, 故名之爲<位宮>. <位宮>有力勇, 便鞍馬, 善獵射. <景初>二年, 太尉<
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正始>三年, <宮>寇<西安平>, 其五年,
爲<幽州>刺史< 丘儉>所破. 語在《儉傳》.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음란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고 왕
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
고 보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의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
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이라 하였
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
다. '정시'삼년 '궁'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검전'에 있
어 전한다.


沃沮(東沃沮)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相婁>·<
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
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
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 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 >故府是
也. <沃沮>還屬<樂浪>.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
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
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호수는 오천이다. 큰 군장은 없고, 세세토록 읍락 각각에 '장사'가 있
다. 그 언어는 '구려'와 크게 같으나, 조금은 다르다. '한나라'초에 '연'의 망명인 '위만'이 '조
선'에서 왕노릇할 때 '옥저'가 속하게 되었다. '한 무제 원봉'이년 '조선'을 치고, '위만'의 손
자 '우거'을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는데, '옥저성'은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와 '맥'이 침입하여, 마을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 '현토'에 있는 옛 마을이 이것
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
縣. <漢>(光)<[建]武>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
沃沮>諸縣皆爲侯國. 夷狄更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 皆濊民作之. <沃沮>諸
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
爲使者, 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爲
婢妾, 遇之如奴僕.

'한'의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에서 다스렸
다. 주령 동쪽을 나누어 칠현을 두었는데, 이때 '옥저'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 건무' 육년
변방의 군을 살피고 '도위'를 없엤다. 그 후로 현에 있는 거사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는데, '불
내', '화려', '옥저'의 여러 현들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하고 쳤는데, 오
히려, '불내'와 '예후'는 '공조'와 '주박제조'를 두었다. 이는 모두 '예'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
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들은 모두 스스로 삼로라 칭하는데, 즉 옛날 현국의 제도인 것이
다. 나라가 작고, 큰나라 사이에 있어 궁핍하여 신하로써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구려'는 다
시 대인들을 사자로 삼았는데, 사는 주인인 것이다. 또한 대가들이 조세를 받도록 하였는데, 맥
포와 물고기, 소금 과 바다음식이다. 천리를 메어 짊어지고 가서 받쳤다. 또한 미녀들을 보내와
첩으로 삼았는데 이는 노비와 같은 것이다.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人性質直彊勇, 少牛馬, 便持矛步戰. 食飮居處, 衣服禮
節, 有似<句麗>.{《魏略》曰: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一]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假埋
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 , 置米其
中, 編縣之於槨戶邊.

그 땅은 기름지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오곡에 마땅하며, 밭농사가 좋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다. 소와 말이 작고, 창병과 보병에 능숙하다. 음식과 거처 의복과
예절은 '구려'와 같음이 있다. '위략'에서 말하길, 그 시집가고 장가드는 법에 여자는 십세가 되
면, 이미 허락을 한다. 사위되는 집에서 이를 맞이하여, 클때까지 길러 부인으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집에서 돈을 요구한다. 돈이 다 떨어지면, 이내 다시 사
위집으로 돌아온다. 장사지낼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
이 출입구를 하나 낸다. 세로 죽은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깍는다. 죽은자의 수와 같다. 또한 기와 모양의 솥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쌀
을 넣고, 곽의 출입구 한쪽에 메어둔다.


< 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相婁>接. <相婁>
喜乘船寇 , <北沃沮>畏之, 夏月 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 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 >
別遣追討宮, 盡其東界.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
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 又說得一布
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國)人衣, 其兩袖長三丈. 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
面, 生得之, 與語不相通, 不食而死. 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는데, 진격하여 이에 이르러 부딧쳤
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포로와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
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
다. '읍루'에 접해 있다. '읍루'는 배들 타고 노략질 함을 즐기는데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 하
여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속에서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춥게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
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에게 부대를 나누어 궁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그
나라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
나의 섬을 얻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
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
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
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
지 안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
다.


相婁

<相婁>在<夫餘>東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其土地多山險. 其人形似<夫餘
>, 言語不與<夫餘>·<句麗>同. 有五穀·牛·馬·麻布. 人多勇力, 無大君長, 邑落各有大人. 處山
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土氣寒, 劇於<夫餘>. 其俗好養 , 食其肉, 衣其皮. 冬以
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隱其前後, 以蔽形體.

'읍루'는 '부여' 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에 닿는다. 남쪽은 '북옥저'에 닿고, 그 북쪽의
끝은 알지 못한다. 그 땅은 산이 험하고 많으며, 그 사람들의 형태는 '부여'와 유사하다. 언어는
'부여'와는 다르고 '구려'와 같다. 오곡이 있으며, 소 말 마포가 있다. 사람들은 용력이 많고,
대군장은 없다. 읍락 각각에 대인이 있다. 산림사이에 거처하면서 항상 동굴에서 산다.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 정도의 깊이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다. 땅기운이 차가운데, '부여'보다 심하다.
그 풍속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겨울에 돼지 비계를
몸에 여러번 두껍게 칠하여 추운 바람을 막는다. 여름에는 곧 벌거 벋고, 한척되는 천으로 앞 뒤
를 가리는 것으로 형체를 가린다.


其人不 , 作 在中央, 人圍其表居. 其弓長四尺, 力如弩, 矢用 , 長尺八寸, 靑石爲鏃, 古之<肅
愼氏>之國也. 善射, 射人皆入(因)[目]. 矢施毒, 人中皆死. 出赤玉·好貂, 今所謂<相婁>貂是也.
自<漢>已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
險, 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 其國便乘船寇盜, 國患之. 東夷飮食類皆用俎豆, 唯<相婁>不,
法俗最無綱紀也.

사람들이 깨끗하질 못하여 중앙에 화장실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둘레에서 거한다. 활의 길이는
사척이고 힘이 쇠뇌만큼 든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길이가 한척팔촌이다. 푸른돌로 화
살촉을 만들니, 옛날부터 '숙신씨'의 나라라 한다. 궁술에 능하여 사람을 쏘면 모두 눈을 맞치
고, 화살에 독을 발라 사람에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나오니, 이제 읍루초
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한'의 말기에 '부여'의 신하였다가, '부여'가 조세와 조역을 중하게
하니, '황초'중에 모반 하엿다. '부여'가 수차례 정벌하였으나, 사람들의 무리가 비록 적으나,
산이 험하고,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 하여 병사로써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
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 하는데, 이웃나라들의 근심거리였다. 동이들은 음식류에
모두 조두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는 아니었다.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昔<箕子>旣
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準]>僭號稱
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結夷服, 復
來王之.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其人性愿慤, 少嗜欲, 有廉恥, 不請
(句麗)[ ].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自<
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
耐濊>皆其種也.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의 가르침으로 가
르치자 문을 닫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에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을 배신하였다. '연','제', '조'나라 사람들
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이 있어 상투틀고 이족옷
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
다. 이로부터, '호'와 '한'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부터의 관직에,
'후',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다.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
려'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다. 남녀의 옷은 모두 분명하게 옷깃이 굽었고, 남자들은 넓이
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을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다.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에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漢>末更屬<句麗>.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捐棄
舊宅, 更作新居. 有麻布, 蠶桑作 . 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 不以珠玉爲寶. 常用十月節祭天, 晝
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
死. 少寇盜.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
出果下馬, <漢><桓>時獻之. {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
志》·《魏都賦》.}

'한'의 말에는 다시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그 풍속에 산과 천을 중하게 여기어 산천으로 각각
부를 나누어서, 서로 들어와 허망함을 바라지 못하게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못하니,
꺼리는 것들이 많았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빨리 버리고, 옛집도 버린다. 새로 집을 짓는
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짓는다. 별자리를 보아서 그래의 풍년들 것임을 미리 알
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마시
고 노래하고 츰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이라 하였다. 또한 호랑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지낸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서로 꾸짓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명하여, '책화'라 한다. 사람
을 죽이면, 죽음으로 보상하고, 도둑이 적다. 창은 길이가 삼장이나 되고, 혹 여러 사람이 함께
창을 들기도 한다. 보병전에 능하다. '낙랑'과 '단궁'이 이 땅에서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오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가 나온다. '한 환제'때에 이것들을 받쳤다. 신하 '송지'가
말하길 과하마는 높이가 삼척이고 타면 가히 과실수를 아래로 해서 간다. 고로 과하라고 하는 것
이다. '박물지', '위도부'에서 보았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
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
使, 遇之如民.

'정시' 육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이 '동예'가 '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불내후'들이 읍을 들고 항복하였다. 팔년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받치니, 다시 '불
내'를 '예왕'이라 벼슬을 내린다고 고하였다. 그는 민간들 틈에 섞여 살면서 사시로 군에 나와
조알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 부역 시키는 일 등을 모두 일반 백성과 똑
같이 대우했다.


韓(馬韓)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
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
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
며,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번한'
이다.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백성들은 토착을 하며 씨를 뿌리며
양잠을 알고, 갈포를 짓는다. 각각 장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를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 國>·<臣 沽國>·<伯濟國>
·<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
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 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
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 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
國>·<酸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
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
·<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 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大
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 報安邪 支 臣離
兒不例拘邪 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
<속로불사국>·<일화국>·<고탄자국>·<고리국>·<노람국>·<월지국>·<자리모로국>·<소위건국>
·<고원국>·<막로국>·<비리국>·<점리비국>·<신흔국>·<지침국>·<구로국>·<비미국>·<감해
비리국>·<고포국>·<치리국국>·<염로국>·<아림국>·<사로국>·<내비리국>·<감해국>·<만로국
>·<벽비리국>·<구사오단국>·<일리국>·<불미국>·<지반국>·<구소국>·<첩로국>·<모로비리국
>·<신소도국>·<막로국>·<고랍국>·<임소반국>·<신운신국>·<여래비리국>·<초산도비리국>·<
일난국>·<구해국>·<불운국>·<불사분사국>·<원지국>·<건마국>·<초리국>, 등 무릇 오십여 나
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 정도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 정도이다. 총 10여만 호 정도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 '신지' 혹은 '가우'를, '신운견지'라 부르는데, 안정됨을 지키
고, 정도에 벗어남을 멀리하고, 신하를 받들어 주는 것과, 아이에게 베푸는것이 사됨이 없어 비
교할수 없다. '진지'는 겸손한 호칭이다. 그 관직은 위나라를 따라서, '읍군', '귀의후', '중랑
장', '도위', '백장'이다.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
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
<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
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
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 >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
水>. 及< >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
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
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후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 망명인 '위만'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 '위략'에서
말하길,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가 '주나라'가 약해짐을 보고, '연'이 스스로를 왕으로
높이고, 동쪽의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병사와 함께
'연'을 공격하여 '주'의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부 '예'가 이를 간하여, 멈추게 되고, '예'
를 서쪽으로 보내어 '연'에게 말하니 '연'도 이를 그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이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지게 되었다.'진'이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
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왕 비'가 섰다. '진'이 엄습할까를 두
려워 하여 복속하여 '진'에 속하였지만, 알현하지는 않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섰다.
이십여년후에 '진', '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시름하였
다. 점점 '준'에게 가서 망명을 하니, '준'이 이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이 '노관'을 '연왕'으
로 삼자, '조선'이 '연'과의 경계를 '패수'로 삼았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이에 이르러,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
풍이 되고자 하니,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의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하였다. '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여, 무리가 점점
많아지니, 이에 '준'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고하길, '한'의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온다.
방비하기 위해 들어가니, 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전쟁을 하는데, 대적하질
못하였다.] 그 좌우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 거하였다.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위략에 말하길 그 아들이 나라에 있어, 성을 '한씨'라 하였다. '준'이 바다가운데 있은
후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로 끊어져 멸망하니, 지금 '한'인이 오히려 그를 제
사지내는 자가 있다.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魏略》曰: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至<王莽><地皇>時, <廉斯 >爲<辰
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
矣.] < >曰:[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辰)< >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
>, 縣言郡, 郡卽以< >爲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
死. < >時曉謂<辰韓>:[ 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五百人已
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 >收取直還. 郡表< >功義, 賜冠
·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한'나라 때에 '낙랑군'에 속하게 되고, 사시 조알하였다. [위략에, 처음 '우거'가 깨어지지 않
았을 때 '조선'의 재상 '역계경'이 간하였지만, '우거'가 쓰지 않았다. 동쪽의 '진국'은 이때에
백성들이 따라나온자가 이천여호나 되었고, 역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때
에 이르러, '염사착'이 '진한'의 우수거가 되었다. '낙랑'이 땅이 좋고, 백성들이 부유하다는 말
을 듣고, 도망쳐 와서 항복하였다. 그 읍락에서 나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한 남자
를 보았는데, 말이 '한'인이 아니었다. 이에 물으니, 남자가 말하길, '우리는 '漢'인이다. 이름
은 '호래'이다. 우리의 무리는 천오백명으로 나무를 베려다, '韓'인에게 붙잡여서 모두 머리를
깍이고, 종이 되었다. 삼년이나 되었다.' '염사착'이 말하길 '나는 '한의 낙랑'에 항복할 것이
다. 당신도 같이 가겠는가?'하니 '호래'가 말하길 '좋다'했다. '염사착'이 '호래'와 '함자현'에
이르러, 현에서 군을 말하니, 군에서 '착'을 통역으로 삼고, '금중'으로 나아가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갔다. 역시 '호래'와 함께이다. 항복받은 무리 천명을 얻었으나, 그 오백명은 이미
죽었다. '착'이 이때 '진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오백명을 돌려 보내라. 만일 그렇지 않으
면, '낙랑'이 마땅히 병사 만으로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하니 '진한'이 말하길
'오백인은 이미 죽었다. 나는 마땅히 재물로써 값겠다.'하고, '진한'에서 만오천명과 '변한'에서
포 만오천필이 나오니, '착'이 거두어 곧바로 돌아갔다.군에서 '착'에게 공로를 표시하고, 관책
과 밭과 집을 하사하였다. 자손이 수대에 내려오다가, '안제 연광' 사년때에 옛날 복재를 받았
다.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
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
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 , 下戶詣郡朝謁, 皆假衣 , 自服印綬衣 千有餘人.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
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환제', 와 '영제'말에 '한예'가 강성해지자, 군현들이 능히 제도 하질 못하고, 백성들이 많이
'한국'으로 들어갔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
고, '공손모', '장창'등을 보내어 유민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한예'를 쳤다. 옛 백성들이 점점
나오니, 이후로 '왜'와 '한'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중에 '명제'가 비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두군의 바다를 건너서,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 읍군의
인수를 하사하고, 다음으로 읍장에게 하사하였다. 그 풍속에 옷과 두건을 좋아하는데, 하호들이
군에 조알할때에 모두 옷과 두건을 한다. 이제 하사한 옷과 두건을 한자가 천여명이나 된다. '부
종사 오림'이 '낙랑'이 '한국'을 통일했다고 해서 '진한'의 팔개국을 나무어 '낙랑'에게 주었다.
통역하는데 다르고 옳음이 있어 전해지자, 신지 '첨한'이 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함께 병사로 쳤는데, '준'은 전사하고, 이군은 '한'에
멸망하게 되었다.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 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如 , 其戶
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以瓔珠爲財寶, 或
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 其人性彊勇, 魁頭露 ,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
.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 之, 通日
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그 풍속은 기강이 적어, 나라의 읍에 비록 주인이 있지만, 읍락에 섞여 살고, 능히 제도하거나
다스림에 능하지 못하다. 꿇어 앉아 엎드려 절하는 예의도 없다. 거처는 흙으로 만든 집에 풀로
지붕을 올리는데, 형태가 무덤과 같다. 그 문은 위로 내고, 가족이 함께 그 가운데 있다. 어른과
아이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그 장사는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소와 말타는 것을 알지 못하여,
소나 말은 사람이 죽었을 때 보내져 쓰인다. 구슬 목걸이를 보내로 삼는데, 혹은 옷에 꾀메어 씀
으로 꾸민고, 혹은 목에 매달기도 하고, 귀에 달기도 한다. 금은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감하고, 상투를 트는데, 모양이 경병과 같다. 포로 옷을 해 입고,
신발은 가죽신을 신는다. 그 나라에 일이 있으면, 관가에서 성곽을 쌓토록 시키고, 용감하고 건
강한 여러 소년들이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에 이를 묶은후, 큰 나무에 붙들어 맨후 종일 지껄이
며, 고함을 치며, 힘을 쓰는데,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 힘쓰는 것과 건강함을 권하는
것이다.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 ,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
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
浮屠, 而所行善惡有異.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 無他珍寶. 禽獸草木略
與中國同. 出大栗, 大如梨. 又出細尾?, 其尾皆長五尺餘. 其男子時時有文身. 又有<州胡>在<馬韓>
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 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 . 其衣有上無
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항상 오월 씨뿌릴때가 되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밤낮없이 쉴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사람이 함께 일어나 따라가면서 땅을 밟는데, 손과 발이 서로
응한다. 마디마다 아뢰는 사람이 있어, 탁무와 비슷함이 있다. 시월 농사가 끝나면 다시 이와 같
이 하는데 귀신을 믿는 것이다. 나라에서 각각 천신에 제사지내는 주인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천군'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나라 각가가에는 특별한 읍이 하나 있는데, 이를 '소도'라고 한
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메달고, 귀신을 부린다. 여럿이서 그 가운데로 도망하면 이
에 돌아오지 못한다. 도둑이 일어나기에 좋다. '소도'의 뜻은 '부거'와 비슷한테 선악을 행하는
것에는 다름이 있다. 그 북방 군과 가까운 나라들은 예의 풍속이 조금 있고, 먼 곳은 죄인과 같
이 노비들과 서로 섞여 산다. 다른 보배는 없고, 짐승들과 초목들도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오
는데 크기가 배만 하고, 또 꼬리가 가는 닭이 있는데, 그 꼬리가 오척이나 된다. 남자들은 때때
로 문신을 한다. 또한 '주호'가 있는데, '마한'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사람들이 작고,
언어는 '한'과 같지 않으며, 곤두 함이 '선비'와 같다.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
하고, 옷에는 위는 있지만 아래는 없어 벌거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과 교역
을 한다.


韓(辰韓)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
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
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
>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늙은 노인이 세를 전하여 말하길 옛날 '秦'의 사역을 피하여 온
망명인이 '한국'에 왔다. '마한'이 그 동쪽땅을 나누어 주었다. 성책이 있고,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 '국'을 '방'이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 하고, '행주'를 '행상'
이라 하였다. 서로 불러 무리로 하니 '秦'나라 사람과 같음이 있으니, 단지 '연'과 '제'의 사물
의 명칭뿐이 아니다. '낙랑'사람을 '아잔'이라 하고 동쪽 사람을 '아'라고 하는데, '낙랑'사람은
본래 그 남은 세력이다. 이제 그 이름을 '진한'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육국이었는데, 점점 나누어
져 열두나라가 되었다.


韓(弁辰)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
借. 有<已 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
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 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
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 大
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변진' 역시 열두나라이다. 역시 여러개의 작은 별읍이 있다. 각각 거사가 있으니 큰 자의 이름
은 '신지'이고 다음은 '험측'이라 하고, 다음은 '번예'라 하고 다음은 '살해', 다음은 '읍차'라
한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
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
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
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
사개국이다. 큰 나라는 사오천가를 이루고 작은 나라는 육칠백가를 이룬다. 총 사오만호이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魏略》曰: 明其爲
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 布, 乘駕牛馬. 嫁娶禮俗, 男
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魏略》曰: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國出
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俗喜歌舞飮酒. 有瑟,
其形似筑, 彈之亦有音曲. 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 . 今<辰韓>人皆 頭. 男女近倭, 亦文身. 便
步戰, 兵仗與<馬韓>同. 其俗, 行者相逢, 皆住讓路.

그 열두 나라는 '진왕'에 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이 하여, 대대로 잇는다. '진왕'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위략에 말하길 밝음이 이주민에게 있어 고로 마한의 제도가 되었
다.] 땅은 좋고, 오곡과 벼에 알맞으며, 양잠과 겸포를 하고, 소나 말을 탄다. 결혼하는데 예절
이 있으며 남녀는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로 장사지내는데, 그 뜻은 죽은자가 날아 오르게 하
고자 하는 것이다. [위략에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로 얽어 매는데 감옥과 비슷하
다.] 나라에 철이 나오고, '한','예','왜',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저자에서 돈을 사용함이
중국의 돈사용과 같아, 두군에서도 넉넉히 사용하였다. 풍속에 노래하고, 춤추고, 음주함을 즐긴
다. 거문고가 있는데, 모양이 '축'과 비슷하고, 연주하면, 역시 소리와 곡률이 있다. 아이나 태
어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르는데, 머리를 모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진한'사람이 모두
'편두'이다. '왜국'과 가까워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한다. 보병전을 하고 병사의 무기는 '마한'과
같다. 풍속에 길가던 사람이 서로 만나면, 모두 길을 비켜준다.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 皆在戶
西. 其<瀆盧國>與<倭>接界. 十二國亦有王, 其人形皆大. 衣服 淸, 長髮. 亦作廣幅細布. 法俗特嚴
峻.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 역시 성곽이 있으며,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서로 유사함이 있으나, 귀신에 제사함은 다른데, 부엌신을 문에서 서쪽에 두는 것이다.
'독노국'은 '왜'와 접해 있다. 열두나라역시 왕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다. 의복은 정결하고,
머리를 길른다. 역시 폭이 넓은 가드다란 포를 짓고, 법과 풍속은 특히 엄하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從郡
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
對馬國>. 其大官曰卑狗, 副曰卑奴母離. 所居絶島, 方可四百餘里, 土地山險, 多深林, 道路如禽鹿
徑. 有千餘戶, 無良田, 食海物自活, 乘船南北市 . 又南渡一海千餘里, 名曰<瀚海>, 至一大國, 官
亦曰卑狗, 副曰卑奴母離. 方可三百里, 多竹木叢林, 有三千許家, 差有田地, 耕田猶不足食, 亦南北
市 .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하여 나라의 읍이 있다. 예로부
터 백여개의 나라가 있어, '한'나라 때에는 알현하는 자가 있었다. 이제 그 역관이 통하는 곳이
삼십나라이다. 군에서 나아가 '왜'에 이르는데, 물로 가서 해안을 따라 돌면 '한국'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구사한국'의 북쪽에 이르러 거리가, 칠천여리나 된다. 처음 하나
의 바다를 건여 천여리에 '대마도'에 이른다. 그 큰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떨어진 섬에 거주하는데, 거리가 사백여리이다. 땅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 호수는 천여호이고 좋은 밭은 없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먹어 스스
로 생활하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며 쌀을 사들인다. 또 남으로 바다 건너 천여리에 일명 '한
해'를 건너면 큰 나라가 하나 있는데, 역시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사
방 삼백리이며, 대나무와 나무가 모여 많은 산림을 이루니, 삼천가정도가 있으며 차이는 밭이 있
어 밭을 경작하는데 부족함이 있어 역시 남북으로 쌀을 사들인다.

又渡一海, 千餘里至<末盧國>, 有四千餘戶, 濱山海居, 草木茂盛, 行不見前人. 好捕魚鰒, 水無深
淺, 皆沈沒取之. 東南陸行五百里, 到<伊都國>, 官曰爾支, 副曰泄謨 ·柄渠 . 有千餘戶, 世有
王, 皆統屬<女王國>, 郡使往來常所駐. 東南至<奴國>百里, 官曰 馬 , 副曰卑奴母離, 有二萬餘
戶. 東行至<不彌國>百里, 官曰多模, 副曰卑奴母離, 有千餘家. 南至<投馬國>, 水行二十日, 官曰彌
彌, 副曰彌彌那利, 可五萬餘戶. 南至<邪馬壹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官有伊支馬,
次曰彌馬升, 次曰彌馬獲支, 次曰奴佳 , 可七萬餘戶. 自<女王國>以北, 其戶數道里可得略載, 其餘
旁國遠絶, 不可得詳.

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노국'에 이르는데 사천여호가 있으며, 산기슭의 바다에 거처한다.
초목이 너무 우거져, 길을 갈 때 앞사람을 볼수가 없을 정도이다. 물고기와 전복을 잡기를 좋아
하는데 물이 깊이 않고 얕아 자맥질하여 이를 잡는다. 동남쪽 육지를 따라 오백리에 '이도국'이
있는데, 관리를 '이지'라 부르고, 부관을 '설모고', '병모고'라 부른다. 천여호가 있으며, 세세
토록 왕이 있는데 모두 '여왕국'에 속해 있어, 고을에 사신이 왕래하고, 항상 머물러 있다. 동남
으로 백리에 '노국'이 있는데 관리를 '시마고' 부관을 '비노모리'리 부르는데, 호수가 이만여호
이다. 동쪽으로 백리에는 '불미국'이 있어, 관리를 '다모'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부르며,
호수는 천여가이다. 남쪽으로 '투마국'이 있어 물로 이십일을 간다. 관리를 '미미'라 하고, 부관
을 '미미나리'라 부르는데, 가히 오만여호이다. 남쪽으로 '사마대국'이 잇어 여왕이 거하는 도읍
으로 물로 십일을 가고 육지로는 한달이 걸린다. 관리를 '이지마'라 하고 다음을 '미마승', 다음
을 '미마획지', 다음을 '노가제'라 하니 가히 칠만여호이다. 이 '여왕국'의 북쪽에 있는 나라의
호수와 길를 가히 얻어 기록한 것인데 그 나머지 주변의 나라는 너무 멀어 끊어져 가히 자세히
얻을 수가 없었다.

次有<斯馬國>, 次有<已百支國>, 次有<伊邪國>, 次有<都支國>, 次有<彌奴國>, 次有<好古都國>, 次
有<不呼國>, 次有<姐奴國>, 次有<對蘇國>, 次有<蘇奴國>, 次有<呼邑國>, 次有<華奴蘇奴國>, 次有
<鬼國>, 次有<爲吾國>, 次有<鬼奴國>, 次有<邪馬國>, 次有<躬臣國>, 次有<邑利國>, 次有<支惟國
>, 次有<烏奴國>, 次有<奴國>, 此女王境界所盡.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其官有狗古智卑狗,
不屬女王. 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다음에 <사마국>, <이백지국>, <이사국>, <도지국>,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소노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사마국>, <궁신국
>, <읍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이 있는데, 이 여왕을 경계의 끝이다. 남쪽에 '구노
국'이 있는데, 남자가 왕을 하고, 관리를 '구고지비구'라 하는데, 여왕에 속해 있지 않다. 이 군
은 '여왕국'에서 만 이천여리나 된다.


男子無大小皆 面文身. 自古以來, 其使詣中國, 皆自稱大夫. <夏后><少康>之子封於<會稽>, 斷髮文
身以避蛟龍之害. 今<倭>水人好沈沒捕魚蛤, 文身亦以厭大魚水禽, 後稍以爲飾. 諸國文身各異, 或左
或右, 或大或小, 尊卑有差. 計其道里, 當在<會稽>·<東冶>之東. 其風俗不淫, 男子皆露 , 以木
招頭. 其衣橫幅, 但結束相連, 略無縫. 婦人被髮屈 , 作衣如單被, 穿其中央, 貫頭衣之. 種禾稻·
紵麻, 蠶桑·緝績, 出細紵· . 其地無牛馬虎豹羊鵲. 兵用矛·楯·木弓. 木弓短下長上, 竹箭或
鐵鏃或骨鏃, 所有無與< 耳>·<朱崖>同.

남자들은 애 어른 없이 모두 얼굴에 문신을 하는데, 예로 내려온 것이다. 사신이 중국에 이르러
스스로를 대부라 칭하였다. '하후 소강'의 아들을 '회계'에 봉하였는데,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함
으로써 교룡의 해를 피하였다. 이제 '왜'의 사람들이 자맥질하여 물고기와 조개잡기를 좋아하니
문신으로 큰 물고기와 바닷짐승이 싫어하게 하여 후에 점점 꾸미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문신
은 각각 다르다. 혹은 왼쪽에 있고, 혹은 오른쪽에, 크고 자고, 신분의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
다. 그 길을 계산하는데 마땅히 '회계'와 '동치'의 동쪽에 있다. 그 풍속은 음란하지 않고, 남자
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무명으로 머리를 감싼다. 그 옷은 다만 가로로 하여 서로 연결하여 동여
메는데 바느질 하지 않는다. 부인들도 머리를 올려 묶고, 통채로 옷을 지어 중앙에 구멍을 뚫고
머리부터 옷을 입는다. 벼가 있고, 모시 삼 양잠이 있어 길쌈하고, 가는 모시와 비단이 있고, 그
땅에 소와 말, 호랑이, 돼지, 양, 까치가 없다. 병기로 창과 방패, 나무활을 쓰고, 목궁은 아래
는 짧고 위가 길다. 대나무로 화살에 쇠나 혹은 뼈로 화살촉을 하기도 하는데, '담이'와 '주애
'와 같이 있고 없음에 있는 것이다.

<倭>地溫暖, 冬夏食生菜, 皆徒跣. 有屋室, 父母兄弟臥息異處, 以朱丹塗其身體, 如中國用粉也. 食
飮用 豆, 手食. 其死, 有棺無槨, 封土作 . 始死停喪十餘日, 當時不食肉, 喪主哭泣, 他人就歌舞
飮酒. 已葬, 擧家詣水中 浴, 以如練沐. 其行來渡海詣中國, 使一人, 不梳頭, 不去 蝨, 衣服垢
汚, 不食肉, 不近婦人, 如喪人, 名之爲持衰. 若行者吉善, 共顧其生口財物; 若有疾病, 遭暴害, 便
欲殺之, 謂其持衰不謹. 出眞珠·靑玉.


'왜'의 땅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여름음식과 반찬이 나오며, 모두 맨발이다. 집이 있어 부모형제
가 함께 거하지만 거처는 다르다. 붉은색 진흙같은 것을 몸에 바르는데, 중국의 분가루를 사용하
는 것과 같다. 음식을 하는데는 '변두'를 사용하고 손으로 밥을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이 있
느나 곽은 없이 흙으로 무덤을 만든다. 처음 사람이 죽흐며 십여일을 상을 치루는데 마땅히 이때
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는 곡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장사를 마
치면, 집안이 모두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연욕'과 같다. 사신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갈때는 한 사람이 머리에 빗질하지 않고, 이나 서캐도 잡지 않고, 의복은 더럽게 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부인과 가까이 하지 않으니 상을 치루는 사람과 같다. 이를 '지쇠'라고 한다. 만일
길을 가는 자가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재물을 그 사람에게 주고, 만일 질병이 있거나, 나쁜해
를 당하면 이를 죽일려고 하는데, '지쇠'가 삼가지 않았다고 그런 것이다. 진주와 푸른옥이 나온
다.

其山有丹, 其木有 · ·豫樟· ·投 ·烏號·楓香, 其竹篠 ·桃支. 有薑·橘·椒· 荷,
不知以爲滋味. 有 ·黑雉. 其俗擧事行來, 有所云爲, 輒灼骨而卜, 以占吉凶, 先告所卜, 其辭如
令龜法, 視火坼占兆. 其會同坐起, 父子男女無別, 人性嗜酒.{《魏略》曰:其俗不知正歲四節, 但計
春耕秋收爲年紀.} 見大人所敬, 但搏手以當 拜. 其人壽考, 或百年, 或八九十年. 其俗, 國大人皆
四五婦, 下戶或二三婦. 婦人不淫, 不妬忌. 不盜竊, 少諍訟. 其犯法, 輕者沒其妻子, 重者滅其門戶
及宗族 尊卑各有差序, 足相臣服. 收租賦. 有邸閣.

산에는 단사가 있는데, 그 나무로는 남·저·예장·유력·투강·오호·풍향 등이 있고, 대나무로
는 가는대와 조지가 난다. 생강과 귤, 산초나무와 양화가 있지만, 맛을 보태는 것인줄 알지 못한
다. 원숭이 와 검은 꿩이 있다. 그 풍속에 일이 있으면 이르는 곳이 있는데, 뼈를 불살라 점을
치는 것이다. 길흉을 점칠 때 먼저 점치는 곳에 고하는데 그 법이 거북점과 같다. 불이 터지는
것을 보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모임에서 앉아서 하는데, 부자와 남녀의 차이가 없다. 사람들 성
질에 술을 즐긴다. [위략에 그 풍속에 정확히 해와 사절기를 알지 못한다. 다만 봄에 밭갈고 가
을에 거두는 것으로 그 해의 기준으로 삼는다] 어른에게 공경을 보이는 것은 단지 손을 잡고 꿇
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수명은 혹은 백살이요 혹은 팔구십살이다. 풍속에 나라의 어
른들은 모두 사오명의 부인이 있는데, 하호들도 혹 이삼명의 부인이 있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
고, 투기 하지 않는다. 도둑이 없고, 송사가 적다. 법을 범하면 가벼운자는 그 처자를 죽이고,
무거운 자는 그 집안에서 종족까지 멸한다. 높고 낮음에 차이가 있으니, 복종해야 한다. 세금을
거두고, 문설주가 있다.

國國有市, 交易有無, 使<大倭>監之. 自<女王國>以北, 特置一大率, 檢察諸國, 諸國畏憚之. 常治<
伊都國>, 於國中有如刺史. 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 及郡使<倭國>, 皆臨津搜露, 傳送
文書賜遺之物詣女王, 不得差錯. 下戶與大人相逢道路, 逡巡入草; 傳辭說事, 或 或 , 兩手據地,
爲之恭敬. 對應聲曰噫, 比如然諾.

나라에 시장이 있어 교역이 있는데 '대왜'가 이를 관리한다. '여왕국'의 북쪽에 특별히 큰 기관
하나를 두는데, 여러 나라를 살피는 것으로 여러나라들이 이를 두려워 하고 꺼린다. '이도국'을
다스리는데 나라 중앙에 자사와 같은 것을 항상둔다. 왕이 경도나 '대방군' 여러 '한국'과 '왜
국'의 군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에게 하사하는 물건과 문서를 보내와 전하는데, 섞임이 없었다.
하호들이 길에서 대인을 만나면 뒷것을질쳐 풀속에 들어간다. 전하는 말로 혹은 웅크리고 있거나
엎드려있는데 양손을 땅에 댄어 공경을 나타낸다. 대답할때는 '아' 그러는데 이것은 그렇다는 것
이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
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
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는 본래 역시 남자가 왕이었다. 칠팔십년후에 '왜국'에 난이 이서 서로 공격하고 벌하며
지내다가 함께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일명 '비미호'로 귀신을 부리고 능히 백성을 미혹게 하여
이미 성인인데도 남편이 없다. 남자 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림을 도왔다. 왕으로써 왔는데 보았
다는 사람은 적다. 여자종 수천이 시중드는데도 오직 남자 한명이 음식을 대고, 나고들면서 말을
전한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각과 성책은 엄하게 만들었고, 항상 병사로써 지키고 있다.


<女王國>東渡海千餘里, 復有國, 皆<倭>種. 又有<侏儒國>在其南, 人長三四尺, 去女王四千餘里. 又
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 船行一年可至. 參問<倭>地, 絶在海中洲島之上, 或絶或連, 周旋可
五千餘里.

'여왕국'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류이다. 또한
그 남쪽에 '주유국'이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삼사척으로 '여왕국'에서 사천여리이다. 또한 '나
국'과 '흑치국'이 그 나라 동남쪽에 있는데 배로 일년을 가야 이른다. 모두 '왜'의 땅으로 바다
가운데에 섬으로 끊어져 있고 혹은 연해 있기도 하니 사방 가히 오천리이다.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其年
十二月, 詔書報<倭女王>曰: [制詔<親魏倭王><卑彌呼>: <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
次使<都市牛利> 奉汝所獻男生口四人, 女生口六人, 班布二匹二丈, 以到. 汝所在踰遠, 乃遣使貢獻,
是汝之忠孝, 我甚哀汝. 今以汝爲<親魏倭王>, 假金印紫綬, 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 其綏撫種人,
勉爲孝順. 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 道路勤勞, 今以<難升米>爲率善中郞將, <牛利>爲率善校
尉, 假銀印靑綬, 引見勞賜遣還.

'경초'이년 유월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등을 보내어 군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헌하기를 구하
자 태수 '유하'가 서울에 사신을 보냈다. 그해 십이월 조서를 내려 '왜여왕'에게 말하길 ' '친위
왜왕 비미호' '대방태수 유하'가 당신이의 대부 '난승미'와 다음사신'도시우리'를 보내와 남자 4
명과 여자 육명, 포 두필이장을 받치니 이에 이르렀다. 당신이 있는 곳이 먼데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니 당신의 충효가 이와 같아, 내가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당신을 '친위왜왕'을 삼는
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인과 붉은 빛 인끈을 봉해서 '대방태수' 에게 보내는 것이니, 당신은 백
성을 잘 다스리고 힘써 효도하고 잘 순종하도록 하라. 당신이 보낸 사신 '난승미'와 '도시우리
'는 길이 먼데 수고가 많았기로,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을 삼고, '우리'를 솔선교위를 삼아
은으로 만든 인과 푸른 인끈을 주고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돌려 보내는 바이다.

今以絳地交龍錦五匹· {臣<松之>以爲地應爲 , <漢><文帝>著 衣謂之 是也. 此字不體, 非<魏
朝>之失, 則傳寫者誤也.}絳地 粟 十張· 絳五十匹·紺靑五十匹, 答汝所獻貢直. 又特賜汝紺地
句文錦三匹·細班華 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眞珠·鉛丹各五十斤, 皆
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 悉可以示汝國中人, 使知國家哀汝, 故鄭重賜汝好物也.]

그리고 강지교룡금 오필과 [ 신하'송지'가, 땅에 비단을 상응하게 한 것은 '한 문제'가 검은옷
입은것과, 두터운 비단을 취한것을 말했으니,이것이다. 이 글귀가 없는것은 위나라때 빠뜨린것이
아니라, 이전에,베껴쓰던 자들의 착오이다], 강지추속계 십장, 청강 오십필, 감청 오십필을 주어
당신이 받친 공물에 대해 답하는 것이다. 또 특별히 너에게 감지구문금 삼필과 새반화계 오장,
백견 오십필, 금 팔냥, 오척도 두자루, 동경 일백 매, 진주와 공단 각 오십근씩을 모두 포장하여
'난승미'와 '우리'에게 주어 돌려 보내는 터이니, 너희는 이를 갖다가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일
일이 보여 주어서 우리 나라가 너희를 아끼는 뜻을 알게 하도록하라. 그래서 정중하게 이같은 좋
은 물건을 너희에게 하사하는 바이다] 했다.


<正始>元年, 太守<弓遵>遣建忠校尉<梯儁>等奉詔書印綬詣<倭國>, 拜假<倭王>, 幷齎詔賜金·帛·錦
·刀·鏡·采物, <倭王>因使上表答謝恩詔. 其四年, <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
人, 上獻生口·倭錦·絳靑 · 衣·帛布·丹木· ·短弓矢. <掖邪狗>等壹拜率善中郞將印綬. 其
六年, 詔賜<倭><難升米>黃幢, 付郡假授. 其八年, 太守<王 >到官.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
王<卑彌弓呼>素不和, 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

'정시' 원년 '태수 궁준'이 건중교위 '제휴'등을 보내서 조서와 인수를 가지고 왜국에 가서 '왜
왕'에게 절하고, 아울러 금백과 금계, 도경, 채물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왜왕'은 표문을 올려
조서와 물건을 내린 은혜에 회답해 왔다. 사년에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와 '액사
구' 등 팔인을 보내서 포로 몇 명과 왜금, 강청, 겸금, 의백, 포단, 목부, 단궁시 등을 바쳐 왔
다. 이에 '액사구' 등에게 한결같이 솔선중랑장의 벼슬을 주고 인수를 주었다. 육년에 조서를 내
려 '왜국'의 '난두미'에게 황기를 주고, 부군을 주었다. 팔년에는 태수 '왕기'가 와서 보고하기
를, '왜국의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의 남왕 '비미궁호소' 사이에 불화해서 '왜국'에서는 '재
사', '오월' 등을 보내서 그들의 서로 공격하는 모양을 보고했다고 한다.


遣塞曹 史<張政>等因齎詔書·黃幢, 拜假<難升米>爲檄告喩之. <卑彌呼>以死, 大作 , 徑百餘步,
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 復立<卑彌呼>宗女<壹與>, 年十
三爲王, 國中遂定. <政>等以檄告喩<壹與>, <壹與>遣<倭>大夫率善中郞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
還, 因詣臺, 獻上男女生口三十人, 貢白珠五千, 孔靑大句珠二枚, 異文雜錦二十匹.

이에 중국에서는 색조연사 '장정'등을 보내서 조서와 황기를 내려 '난승미'에게 벼슬을 주고 화
친하도록 타일렀다. '비미호'가 죽자 크게 무덤을 만들어 직경이 백여 보나 되게 한 다음 여기에
노비 백여 명을 순장했다. 뒤를 이어 다시 남왕을 세웠으나,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복종하지
않고 저희끼리 서로 죽이고 싸워서 이 때 죽은 사람만도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비미호'의 일가 딸이 되는 '대여'를 세웠다. 이 때 대여의 나이는 겨우 십삼세였
는데 비로소 나라안의 인심이 정해졌다. '정' 등이 '대여'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더니, '대여'는
'왜국'의 대부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삼십명을 '정'에게 보내 와서 뵙고 포로 삼십명과 흰 구
슬 오십덩이, 청대구주 두장, 이문잡금 이십필을 바쳐 왔다.

원문링크 : http://blog.chosun.com/orullee/309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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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


시험기간만 되면 나타나는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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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時 : 2010年 10月 21日 (木曜日)

場 所 : 忠南大學校 博物館 視聽覺室

後 援 : (財)百濟文化財硏究院

10:30 : 登 錄

10:40 : 開會辭

朴洋震(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長)

司會者 : 張寅成(忠南大學校 史學科)

10:50~12:00

發表主題 : 中國古代都城的園林

發 表 者 : 劉振東(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討 論 者 : 金秉駿(翰林大學校 史學科)

12:00~13:00 점심

13:00~14:10

發表主題 : 古代 日本의 宮苑

發 表 者 : 小野健吉(日本 奈良文化財研究所)

討 論 者 : 禹在柄(忠南大學校 考古學科)

14:10~15:20

發表主題 : 百濟宮城의 後苑-益山 王宮里遺蹟을 중심으로-

發 表 者 : 金洛中(全北大學校 考古文化人類學科)

討 論 者 : 權五榮(韓神大學校 國史學科)

15:20~15:30 : 휴식

15:30~16:40

發表主題 : 苑池를 中心으로 바라본 新羅의 宮苑

發 表 者 : 吳承燕(韓國文物硏究院)

討 論 者 : 池炳穆(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16:40~16:50 휴식

16:50~17:30 綜合討論

座長 : 朴淳發(忠南大學校 考古學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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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팀에 비해 조금 특별한 이력을 가진 멤버로 구성된 약용(藥用)식물팀이다.

다음 수목원까지 조사를 마친뒤, 우리조는 멋진 조경을 설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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